도산신문 - 도산애기애타총원우회 여원동 기자 | "그런즉 우리 민족을 타민족 압박하에서 해방하고 쇠퇴한 가운데서 번영케 하는 대사업을 이루려면 그 사업을 이룰 만한 힘이 있어야 하겠고, 그 힘이 있으려면 힘을 낼 만한 건전한 인격자와 신성한 단결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우리 무리는 우리가 깨달은 대로 순서를 찾아 나가기 위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하며 신성한 단체를 조직하기로 목적을 세우고 흥사단을 조직하였습니다." 1926년 상하이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흥사단 단우회 모임에서 한 연설의 일부입니다. 당시 흥사단 단우 신두식의 필기로 보존되어 있던 것을 미주에서 오랫동안 흥사단 활동을 한 곽림대가 흥사단본부에 보내온 <안도산>이란 긴 원고 가운데 '도산의 연설과 언론'에 들어 있던 글입니다. 도산이 흥사단 단우에게 건전한 인격과 신성한 단결, 동맹수련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박용만은 1904년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보안회 운동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이승만과 만나 의기 투합, 의형제 같은 절친한 동지가 되었습니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1909년에 네브래스카의 커니농장에서 무
도산신문 - 도산애기애타총원우회 여원동 기자 | "제군이여, 일은 힘의 산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는가? 만일 이것을 믿고 힘을 찾는다 하면, 그 힘은 어디서 오겠는가? 힘은 건전한 인격과 견고한 단결에서 난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그러므로 인격 훈련, 단결 훈련, 이 두 가지를 청년 제군에게 간절히 요구하는 바이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이 베이징에서 구술하여 흥사단 기관지 <동광> 1931년 2월호 게재를 통해 국내에 소개된 '청년에게 호소함' 중에서 '인격 완성과 단결 훈련'에 관한 글의 가운데 부분에서 한 말씀입니다. 도산은 이 글에서 한국의 청년에게 건전한 인격 훈련과 더불어 단결력에 우리 민족의 사활이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산 선생은 대전감옥에서 가출옥한 지 28개월 만인 1937년 6월 28일, 평양 대보산 송태산장에서 일본 경찰에 다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중일 전쟁(7월 7일)을 앞두고 일본은 신사 참배 강요, 한국말 사용 금지, 민간 신문 폐간 등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을 획책했으며, 좌익 세력을 총검거하여 투옥한 뒤 최종으로 남아 있는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을 탄압할 계획을 세워 소위 동우회(同友會) 사건을
도산신문 - 도산애기애타총원우회 여원동 기자 | "우리는 지금 전 민족적으로 파멸의 지경에 처하여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급히 덤비지 않으면 아주 영멸하는 지경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러니 여기 대하여 앞을 헤치고 나아가지 않고 방황하고 주저하고 있는 것은 이것이 공적(公敵: 공공의 적)이외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한국의 청년에게 준 글로 흥사단 기관지 <동광> 1927년 1월호에 소개된 '대한 청년의 용단력과 인내력'이란 글의 가운데 앞부분의 말씀입니다.
도산신문 - 도산애기애타총원우회 여원동 기자 | "일할 때 큰일에나 작은 일에나 속이지 않기를 결심하오. 나랏일은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요, 전 국민이 함께 하여 성공할 줄 알고 결심합시다." * 1919년 6월 28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하면서 행한 연설의 일부로, 무릇 나라의 지도자는 정직해야 하며 국민과 함께 일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우강 양기탁은 1904년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했습니다. 1907년 도산을 비롯한 민족 지도자와 함께 조국 광복을 도모하기 위한 비밀 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했지요.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했으며, 고려혁명당을 세워 무장 투쟁을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투옥과 탈출, 투쟁을 쉼 없이 이어나갔으며,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이 되었습니다.
도산애기애타총원우회 여원동 기자 | "우리의 권능은 세 가지가 있소. 그 둘째는 우리가 우리 주권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위에 모범적 공화국을 세워 이천만으로 하여금 천연의 복락을 누리려 함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희생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여야 하겠소." 1919년 6월 28일, 도산안창호 선생이 상하이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하면서 행한 연설로 모범적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온 민족이 헌신해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대조선국민군단은 1914년 6월 10일, 미국 하와이 오아후(Oahu)섬 아후이마누(Ahuimanu)농장에서 독립군 사관 양성을 목적으로 박용만(朴容萬)이 주도하여 만들어진 군사 교육 단체였습니다. 이는 도산 선생이 이끄던 대한인국민회의 연무부를 확대·개편한 것으로서 항일 무력 투쟁에 대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함이었으며, 운영 자금은 안원규·박종수 등이 파인애플 농장 등에서의 수익금을 기부해 마련했습니다. 1916년 10월에는 단원이 311명으로 늘어났으나 미국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승만이 군사 활동보다 외교 노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데다 박용만이 실전에 참가하기 위해 극동 지역으로 떠나면서 조직 유지가 어려워 1917년경에 해체되었